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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한재열은 작가 생활의 출발점으로 2010년 대지진이 휩쓸고 간 아이티에서의 파병 생활을 꼽곤 한다. 한재열의 그림은 재난의 자리에서 시작된 셈이다. 자연재해와 인재 중에서도 지진은 유별난 재해다. 지진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뿐 아니라 우리가 몸을 기대고 있는 바닥, 존재의 거처를 가르고 무너뜨리는 재난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무너진 바탕과 다름없는 대지에 다시 집을 지어야 한다. 무너진 바탕에서 시작된 그림은 무엇을 재현할 수 있을까? 아이티 파병에서 돌아온 후 아일랜드로 떠난 한재열은 매일 거리에 나가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크로키 했다고 한다. 이후 한재열은 십여 년간 『Passersby』 연작을 이어나간다. 네 번의 개인전을 통해 발표될 『Passersby』 연작의 캔버스는 얼핏 보아 재난으로 부서진 형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그곳에는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외양의 차이, 즉 눈, 코, 입이나 사회적 기호, 즉 인종, 성별이나 계급을 추측할 수 있는 기호를 제거한 얼굴 아닌 얼굴이 있다. 이 형상은 질료적 원상태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색채 덩어리, 얼굴의 자리, 자국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과 비인간을 가로지르는 이 초상 아닌 초상‘들’은 십여 년 동안 한재열의 캔버스에서 사라지는 대신 계속 계열을 만들며 ‘출현’한 셈이다. 출현한 침묵, 가령 굳게 다문 입이 일종의 외침을 재현하듯, 사라짐의 출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존재를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한재열의 후속 작업이 『Bystanders』 로 명명한 군상 시리즈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인류의 재난이었던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인간과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했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정치적 차원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수의 인간들을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단수의 인간이 인간 일반, 인간의 총체성을 떠올리게 하는 용어라면 다수성으로서의 인간들이라는 용어는 조정 가능성(modulable)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문서고에서 역사 속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한 기록물을 살펴온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는 육체적 양상을 기술한 문서를 역사 기록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아닌 인간들, 영혼의 존재가 아닌 육체의 존재들을 통해 정치와 역사의 차원을 복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괴테의 <색채론>에 대한 애정을 표현해 온 한재열의 작업, 초상들의 얼굴(『Passersby』), 얼굴들의 초상(『Bystanders』)에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가시성의 세계를 조각내는 동시에 뒤섞으면서 한재열의 색채-터치는 일종의 모듈처럼 작동한다.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반복을 위한 모듈이 아니라 확정된 이름과 윤곽의 바깥에서 이질성과 복잡성의 감각적인 지대를 조율하는 색채-이미지의 모듈.
특히 역사적 재난과 주변인의 기록 이미지를 조각조각 참조하고 변형, 재배열한 <The gathering> 연작에 이르면 이질성의 감각적 세계에 깃든 정치성과 역사성이 매섭게 관람객을 응시한다. <The gathering, a man with a bottle>나 <The gathering, bystanders>의 검은 그림자가 그렇다. 군중의 형상을 받치고 있는 검은 그림자는 우리에게 먼저 캔버스 속 인물들이 겪고 있는 재난, 겪게 될 재난을 상상하도록 할 것이다. 다음 순간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캔버스 속 인물의 얼굴 아닌 얼굴에 포갠다. 우리 앞에서 인물의 재난을 환기하던 검은 그림자는 순간 우리 내면의 그림자가 되고 우리는 인물의 재난을 인류의 재난으로 경험한다.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얼굴은 우리의 얼굴이 되었다가 마침내 우리를 바라보는 우리 내면의 얼굴이 된다. 한재열의 캔버스에서 이미지의 전율이 출현하는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다.
이나라 이미지문화연구자,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